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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개혁

무지와 타락이 종교 개혁을 불러왔다

2017년 01월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교회와 개혁’은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아 과거 기독교 역사 중 한국 교회에 필요한 개혁의 주제들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사이자 푸른초장교회 임종구 목사가 짚어 보는 코너다.




올해는 종교 개혁(The Reformation)이 일어난 지 500주년(1517~2017)이 되는 해다. 종교 개혁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개신교도들은 참된 교회를 향한 열망을 갖고, 썩어져 가던 중세 교회에서 새로운 교회 건설에 투신한 종교 개혁가들의 용기와 사상, 그리고 신학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여전히 또 다른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도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종교 개혁을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적이고, 신학적 차원에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배경을 이해하면 종교 개혁이 한눈에 들어오고, 좀 더 입체적으로 종교 개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차제에 <디사이플> ‘교회와 개혁’이라는 코너를 통해 종교 개혁과 관련한 글을 기고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자 기쁨이다. 아무쪼록 독자들에게 유익과 도전이 되기를 바란다.


왜 종교 개혁이 일어났는가?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는 루터의 등장을 하나의 시대적 요청으로 보고 “그는 마땅히 이 세상에 와야만 했다”(Luther musste kommen)라고 말하면서 종교 개혁을 필연적 사건으로 칭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그 시대 모든 지식인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종교 개혁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돼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먼저 교회의 타락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교회의 타락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그 어떤 제어 장치도 없이 지속됐을까? 그것은 평신도들의 무지 때문이다. 결국 ‘무지와 타락’, 이것이 중세 교회의 자화상이자 또한 종교 개혁의 원인인 것이다.
교회사에서 종교 개혁은 중세와 근현대 교회사의 중간에 위치한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중세 교회까지의 역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로 A.D. 313년의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들 수 있는데,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로마에서 공인을 받았다.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동방의 리키니우스 황제가 공동 명의로 내린 밀라노 칙령은 수백 년 동안 많은 황제들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받아 온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그 내용은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라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재산을 평민들에게 돌려줬고, 자신의 사비를 털어 교회를 건립하기도 했다. 또한 성직자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그에 따라 노예 처벌 금지법, 죄수 학대 금지법 등을 제정했고, 321년에는 최초로 일요일을 휴일로, 380년에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박해받던 기독교가 특혜받는 기독교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교회 타락의 역사가 시작됐다. 권력과 돈이 교회에 들어가고 집중되면서 타락은 가속화되고, 조직화되며 신학화됐다. 박해 기간 동안 쌓았던 경건의 능력은 무너지고, 교회의 첨탑은 높아만 갔다.
롤란드 베인튼(Roland H. Bainton)의 말과 같이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고, 제롬(St. Jerome, Hieronymus)의 지적처럼 예배당의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은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졌다. 특히 콘스탄티누스는 하나의 제국(one Empire), 하나의 법(one Law), 하나의 시민(One Citizen), 하나의 종교(one Religion)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와 교회에 정치성이 도입됐고, 이는 교황 제도의 신호탄이 됐다.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방대해졌고,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교구 등의 거대 교구들의 감독들은 정치적 수위권(首位權)을 다투게 된다. 이런 수위권 다툼은 제국의 수도가 로마라는 이유로 행정상의 구분에 불과하던 교구의 차서가 교회의 수위권으로 오해되고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타락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교황, 사제, 수도사들이었다. 8세기 이후 교황은 세속 군주화됐고, 사제들은 주교 제후(Prince bishops) 곧 자신은 주교로서는 독신이지만 봉건 제후로서는 기혼이라고 주장했다. 수도원 역시 가난한 수사들의 집이 아니라 부요해졌고 약탈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칼을 찼으며, 시류에 편승해 교황들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교회의 정치성은 더욱 노골화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정 체제(Theocracy)가 됐다. 신정 체제에서 십자군 사상이 생겨나고, 성직자의 독신이 강제됐다.
이 신정 체제의 기초가 성례 제도다. 교회가 세례, 혼인, 고해, 종부, 신품을 관장했고, 13세기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t Ⅲ)에 와서는 유럽의 그 어떤 군주도 갖지 못한 권력을 지니게 된다. 그뿐 아니라 신학 체계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집대성돼 통합적인 신학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 모든 정치적 성향은 교회를 국가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려놨고, 봉건 제도와 성직 계급은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교회는 몰락하기 시작했고, 14세기부터 재정이 악화된 교회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교구와 수도원으로부터 돈을 쥐어짰다. 본격적으로 교회의 타락이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 운동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했다. 상업은 부활했고, 화폐가 교환 수단이 되면서, 교회의 재원 역시 현물 세입에서 금전 세입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교회의 바벨론 포로기(1305~1378)를 지나면서 아비뇽의 교황들은 교황청 금고를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됐고, 돈을 끌어모을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때 면죄부(indulgences)가 도입된다. 면죄부는 로마 교황이 교회의 건립 비용과 부족한 재정을 해결하고자 금전이나 재물을 봉헌한 사람들에게 죄를 면해 준다는 뜻으로 교부한 증서다.
이 이론은 점점 발전해 연옥에 갇혀 있는 죽은 자들에까지 확대됐고, 그들의 형기를 삭감 내지 완전히 면제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서까지 돈을 걷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 결과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이 징수하는 국세보다 3배나 더 많은 돈을 면죄부로 거둬들였다.
흔히 중세 교회의 타락을 말하면 면죄부를 떠올리게 된다. 면죄부가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죄부는 고해 성사 때 요구하는 보속(補贖, satisfaction)을 면제해 주는 것으로, 사죄를 돈으로 매매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점 확대돼 현세와 연옥의 죄로 인한 형벌 자체를 면제해 주는 데까지 발전하고, 나아가 죄의 형벌뿐만 아니라 죄책까지도 면죄해 주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 잉여 공로는 교회의 곳간에 저장된 공로 기금으로, 교회가 지닌 열쇠의 권세에 힘입어 사용되며, 그리스도께서는 보혈 한 방울이면 세계를 구원하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피를 흘리셨으며, 마리아는 죄 없이 공로를 남겼다고 말한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면죄부의 시한을 40일로 제한했고, 1903년 피우스 10세는, 교황은 200일, 대주교는 100일, 주교는 50일의 면제를 부여할 수 있다고 정했다.
식스투스 4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따라 연옥의 영혼들은 지상 교회의 관할권에 속했다는 것을 근거로 면죄부를 연옥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1476년 죽은 자들에게 면죄를 부여한 식스투스의 대칙서는 교회당 건축을 위해, 부모가 죽은 자녀들을 위해, 친구들이 죽은 친구를 위해, 연옥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일정액을 납부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제공했다.
면죄부는 중세 마지막에는 여러 종류의 자선 사업과 터키에 대한 십자군 원정, 성유물들과 연계한 성당과 병원 건축, 교량 건설, 제방 보수와 같은 데 사용됐다. 면죄부 발급에는 기금 납부가 따랐고, 기금 가운데 30∼50%가 로마로 갔다. 면죄부 판매금을 관리한 후거 가문(The Fuggers)은 수익금 가운데 교황에게 돌아가야 할 몫으로 5%의 송금수수료를 냈다.
루터 당시 면죄부 설교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 테첼이다. 작센의 어느 기사는 테첼에게 찾아가 자기가 마음에 품고 있는 죄를 위해서 3마르크 은화를 건넸다. 그러나 테첼은 적어도 30마르크를 내야 한다고 말했고, 기사는 그 액수를 지불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테첼을 습격해 자신이 면죄부 값으로 낸 돈을 도로 빼앗았다. 그 기사는 이제부터는 아직 짓지도 않은 죄를 위해서 미리 면죄부를 사지 않겠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교회 타락의 중심에는 돈이 있다
교황청이 얼마나 집요하게 돈을 걷어 냈는지를 살펴보면, 왜 중세를 ‘암흑기’라고 일컫는지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먼저 주교가 임명될 때마다 첫해의 수입(初年奉, annate)은 교황에게 바쳐야 한다는 법률을 도입했다. 또 주교에 공석이 생겼을 때 임명을 미루는 대신, 교황이 그 기간의 모든 수입을 차지했는데 이를 유보권(留保權, reservation)이라고 불렀다.
유급 성직이 공석이 되면 유망한 후보가 이를 차지하기 위해 사례금으로 미리 예약금을 내는 것을 허용했다. 성직 매매를 위해 교황은 로마에 거래소(Dataria)를 세웠는데, 성직록과 교구령 장사를 하는 사람은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됐다. 여기서는 서약이 파기되고 수도사들이 수도회를 떠날 자유를 얻었다. 성직자들에 의해 결혼이 매매되며, 사생아가 적자(嫡子)가 될 수 있었다.
교황은 3천 명 이상의 비서를 뒀고, 교황을 보조하는 949가지의 사무원들이 있었다. 이 외에도 터키 사람들과 싸우려고 한다는 핑계로 사라센(saracen, 유럽 중세에 이슬람 교도를 이르는 말) 세를 걷었다. 교황이 주교에게 털로 짠 외투인 팔리움(pallium)을 수여했는데, 대주교로 선출된 자는 3개월 이내에 로마에서 팔리움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교직 시행이 정지당했다.
탐욕은 끝이 없어서 한 사람이 여러 교회와 교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주교 보좌직 제도를 만들었는데, 연로하거나 무능한 주교의 교구에 교황청에서 보좌 주교를 파송하고, 위탁 제도, 인콤파티빌리아 등으로 한 명의 주교가 무려 22개소의 교구와 7개소의 수도원, 44개소의 대성당을 소유하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성직 매매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가슴속의 보류’(mental reservation)라는 제도를 고안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로마에서 관례를 따라 성직록을 얻고 또 정식으로 지명을 받은 후에 다른 사람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오면 그 성직록을 처음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두 번째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다. 누가 이것을 비난하면 교황은 ‘가슴 속의 보류’를 근거로 자신의 자의적인 처분을 위해 자기 머리와 마음속으로는 이것을 보류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16세기 독일에서 제일 큰 자본가였고, 국제적 은행가였던 아우크스부르크의 후거 가문에서는 주교구와 성직록을 대여하고 교환, 매매하는 일을 진행했는데 그곳에서는 면죄부, 교서, 자신이 고해 신부를 선택할 수 있는 고죄장, 사순절 기간에도 버터, 우유, 계란, 채소를 먹을 수 있는 버터 식용 허가증을 판매했다. 또한 로마 순례를 공로로 지정해 로마를 동경하게 만들었고, 죽은 자의 미사를 만들어 사람들을 올무에 걸리게 했다.
이같이 성직과 사죄를 매매하는 장면이 중세 교회의 마지막 얼굴이다. 중세 교회는 권력과 돈에 눈이 먼 교회였다. 이들의 모습은 ‘무지와 타락’의 모습이었다. 무지라는 것은 면죄부가 왜 성경에서 벗어난 것인지를 몰랐다는 것이요, 타락이라는 것은 거룩함과 성결을 돈으로 거래했다는 것이다.


불편한 양심
종교 개혁이 다시 500년 만에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고 들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종교 개혁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현재 한국 교회는 권력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의 양심은 이 질문 앞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과 재화가 자유하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돈과 권력의 힘이 교회에까지 흘러들어 오고, 돈의 논리가 사람들을 지배한다. 현대판 성직 매매에 비견될 수 있는 담임목사직의 세습, 임직식 때의 임직 헌금 강요, 교단 선거에서 드러나는 금권 선거, 회중을 현혹시키는 번영 신학과 신사도주의는 여전히 ‘개혁 교회는 부단히 개혁돼야 하는 교회’라는 명제를 던진다.

Vol.209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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