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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산실, 제네바교회와 칼뱅

2017년 10월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흔히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의 로마”(The Protestant Rome)로 불린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John Knox, 1513~1572)는 “제네바는 사도들의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다. 다른 지역에서도 그리스도가 참되게 선포되지만, 이 도시처럼 생활과 신앙이 참되게 개혁된 곳을 나는 보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학자들은 이렇게 칼뱅이 사역했던 제네바교회가 종교개혁의 산실이 됐다는 점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보이고 있다. 칼뱅은 제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스위스 제네바를 성경적 교회로 세우는 데 자신의 후반기 생애를 바쳤다. 또한 그의 신학은 스위스는 물론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영국, 헝가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556년 메리 여왕의 신교 박해를 피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존 녹스가 바라본 제네바는 1555년 오랜 토착 세력이었던 페랭파가 축출되고, 본격적으로 칼뱅의 신학이 제네바에서 꽃피우던 시기였기에 더욱 이상적인 기독교 도시로 비춰졌을 것이다. 1536년 제네바교회는 전격적으로 개혁을 받아들이지만 너무도 미숙했고, 칼뱅은 이 도시에서 한 번의 추방과 두 번의 체류를 포함해 28년 동안 이 도시를 위해 설교하며 분투했다. 이번 호에서는 제네바교회의 건설 과정과 칼뱅의 역할, 그리고 제네바교회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어둠 후에 빛
제네바는 스위스의 도시 중에서도 가장 늦게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인 곳이다. 1522년 소위 ‘소시지 사건’으로 취리히에서 시작된 개혁은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장크트갈렌으로 퍼져 나가 마침내 제네바에까지 이르렀다. 15세기 내내 제네바는 상업이 번창한 도시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취약했다. 프랑스와 베른, 프리부르와 사부아가 서로 제네바를 교두보로 확보하려고 했다.
제네바는 50개 제국 자유 도시 중 하나였지만 주교 군주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부아 공작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는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베른, 프리부르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베른과 군사동맹을 맺게 되고 자연스럽게 베른의 종교를 수용했다. 1536년 1월 베른의 군대가 제네바를 향해 진격하자, 제네바는 정치적 독립과 함께 시민들이 손을 들어 복음을 따라 살기로 맹세한다. 그리고 그해 발행한 동전에 ‘어둠 후에 빛’(Post Tenebras Lux)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신생 프로테스탄트 도시국가로 탄생한 제네바의 교회는 칼뱅의 말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베른과의 군사동맹과 함께 베른의 목사들이 파견됐다. 앙투안 프로망이 1532년부터 설교를 시작했고, 파렐은 1534년부터 리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해 12월 시의회는 “설교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도시를 떠나는 것이 낫다”라고 공포했다. 이때 주교의 권한이 시의회로 이양됐다.


칼뱅, 제네바에 불시착하다
칼뱅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를 ‘제네바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네바가 개혁을 선언한 1536년, 칼뱅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역작 『기독교강요』를 출판한다. 같은 해 칼뱅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마지막으로 파리를 방문하고,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나아가다가 칼5세와 프랑수아1세의 전쟁으로 인한 전투 병력의 이동으로 제네바에 기착하게 된다.
당시 칼뱅의 남동생 앙투앙과 여동생 마리, 그리고 친구 뒤 티에가 함께했다. 그러나 칼뱅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파렐의 강권으로 칼뱅은 제네바에 남게 되고, 성경 강사로서 사역의 첫발을 내딛는다.
1537년에 칼뱅은 ‘교회설립 시안’을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다. 이 설립 시안에는 성만찬과 권징의 시행, 시편 찬송과 어린이 교리 교육, 결혼 제도의 정비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오랜 구교의 미신적 관습에 익숙한 제네바 시민들은 칼뱅의 교회 개혁을 거부한다.
가장 민감한 부분은 성만찬이었다. 제네바 시민들은 누룩 없는 무교병을 원했고,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는 것을 간섭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밝혔듯이 말씀과 성례전은 참교회의 표지며, 특별한 경외 없이 감히 성찬에 참여하려는 한 제대로 된 교회의 조직을 갖췄다고 할 수 없었다. 1538년 급기야 칼뱅은 부활절 성찬식 집례를 거부했고, 시의회도 이에 맞서 칼뱅, 파렐, 코르의 추방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베른의 중재가 있었고, 칼뱅이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결국 72시간 내에 국경을 떠나야 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피난민들의 교회인 생 니콜라이(Saint-Nicolai)교회에서 설교했고, 김나지움에서 강의하면서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종교 회담에 참석했다. 또 『기독교강요』 제2판(1539)을 펴냈고, 『로마서 주석』을 발간했다. 칼뱅은 이들레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지만 극심한 가난으로 하숙을 쳐야 했고,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재단사 조합에도 가입했다. 칼뱅은 이곳에서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의 교회론에 영향을 받고, 요하네스 슈투름(Johann Strum)으로부터 교육에 대해 배운다.
칼뱅이 떠난 후 제네바교회는 다시 베른 목사들이 설교를 하지만 교회의 질서가 잡히지 않았고, 카르펜트라스의 주교였던 추기경 사돌레토(Jacop Sadoleto)가 회유의 서신을 보내온다. 답신을 작성할 사람을 마땅한 찾지 못하던 제네바와 베른은 자신들이 추방한 칼뱅에게 답신 작성을 요청한다. 그가 6일 만에 작성한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주는 답신’은 당시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칼뱅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칼뱅은 답신에서 자신은 제네바교회와 떨어져 있으나 부모와 같은 애정으로 감싸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며, 이는 누구도 가로막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칼뱅에게 제네바는 추방되고 제적된 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속한 교회며, 칼뱅 스스로가 이 문제의 중심에 있고, 또 모든 개혁 교회의 대표자인 것처럼 말한 것이다. 칼뱅은 이 일로 다시 제네바로 귀환하는데, 스트라스부르에서 교회 건설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며 이전보다 더 성숙해졌다.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다시 교회 건설을 시작하면서 ‘교회법령’(Les Ordonnances Ecclsiastiques de 1541)을 내놓는다. 이 법령은 교회의 네 가지 질서를 포함한다. 사중직제가 제시되고 목사는 목사회(The Venerable Company of Pastor)에서, 교사는 아카데미(Geneva Academy)에서, 장로는 치리회(Consistory)에서, 집사는 구빈원(Hospital)에서 사역하도록 제네바 4대 기관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칼뱅의 제네바 사역에서 구심점을 이루는 기초가 된 제네바 목사회가 있었다.


제네바 목사회
제네바교회에는 5명의 목사와 3명의 보조자가 있었고, 베른 지역에 있는 제네바 영지에 속한 시골 교구의 목사들이 있었다. 제네바와 시골 교구의 목사들은 매주 금요일 생 피에르교회나 칼뱅의 강당에서 오전에는 성경 주해를, 오후에는 신학토론으로 회집했다. 바로 이 성경연구 모임에서 목사들은 돌아가면서 성경 본문에 대해 주해하고 토론했다. 칼뱅은 모임의 회장으로 토론을 시작하고 요약한 후 폐회기도를 했다.
이렇게 토론한 내용은 『칼뱅주석』으로 발간됐고, 이는 성경 해석의 일치를 이루며 이단을 축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모임은 여성을 비롯한 일반 신자들의 방청이 가능했고, 질문도 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오전에 성경 주해를 한 설교자에 대한 평가와 교리와 신학에 관한 주제로 발제와 토론을 했다. 오전 모임은 프랑스어로 진행했고, 오후 모임은 라틴어로만 진행다. 이때 일반 신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또 오후 모임에는 세 달에 한 번씩 형제애적 견책이 시행됐다.
이렇게 제네바 목사회는 매주 모여 성경 해석과 교리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상설적이며 대중적이고, 연대적이었던 이 모임은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구심점이 됐다. 목사회는 제네바 아카데미의 목사 후보생들에게 성경 주해를 가르쳤고, 신임 목사를 선발하고 치리회와 함께 시찰 위원을 선정해 각 교구를 돌봤다. 또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강의하고 구빈원을 지도하며 장로들과 함께 치리회를 이끌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종교의 선택이 신앙속지주의였다면, 스위스 개혁파 도시들에서의 종교의 선택은 시의회의 결정이었다. 시의회는 종교 회담을 통해 도시의 신앙을 결정했고, 목사회는 도시국가의 국가 통치 이념을 제공하는 신학 연구소 역할을 했다. 곧 목사회의 신학은 도시의 신학이 됐다.
이때 제네바가 약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목사회의 금요일 회집, 즉 ‘콩그레가시옹’(Congrgation)이었다. 또 질서와 일치를 목회 현장에 접목한 것은 치리회, ‘콩지스투와르’(Consistoire)와 제네바 아카데미, 종합 구빈원이었다.
이렇게 칼뱅은 제네바 4대 기구를 통해서 기독교 도시국가가 어떻게 각자 은사를 따라 직분을 감당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런 근대성은 루터파를 앞질러 칼뱅파가 전 유럽에 영향력을 미치게 한 동인이 됐다. 그 가운데서도 1559년 개교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칼뱅의 개혁을 제네바를 넘어 전 유럽으로 확장시키는 가교가 됐다.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한 개혁
1541년 칼뱅은 ‘교회법령’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교회가 황무지 같은 곳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하며, 자녀들이 목회직과 시민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칼뱅의 이런 바람은 18년이나 지나서 이뤄졌다. 칼뱅은 같은 해 비로소 제네바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칼뱅의 적대자들이었던 페렝파가 축출됐다.
공교롭게도 페렝파가 국외 탈출을 하면서 남긴 부동산을 처분해 그 자금으로 아카데미를 세웠다. 그런데 흑사병을 염려해 리브(Rive)와 앙투안 거리(st. Antoine) 사이의 언덕 위에 신선한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에 세워졌다. 새 건물에서는 주로 초등학교 교육 과정인 스콜라 프리바타(scholar privata) 수업이 이뤄졌고, 고급 단계의 교육 과정인 스콜라 푸블리카(scholar publica)는 ‘칼뱅의 강당’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진행됐다.
개교식은 1559년 6월 5일 생 피에르교회에서 열렸다. 초대 교장이었던 베자는 “여러분들은 헛된 레슬링 게임을 구경하려고 체육관으로 몰려갔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시시한 게임에 참여하려고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과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으로 잘 준비돼서,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높이고 여러분의 조국을 영광스럽게 하며 여러분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지휘관의 거룩한 군병으로 소집됐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연설했다.
1559년에서 1564년까지 339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전교생은 1,500여명이었다. 이 학교를 통해 목사와 선교사 등 다양한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교육은 종교개혁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를 통해 칼뱅의 영향력은 제네바를 넘어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와 한국에까지 미쳤다. 200년 후 제네바 시계수리공의 아들이었던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제네바 아카데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고향 제네바의 노동자와 다른 곳의 노동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제네바의 시계공은 모든 것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파리의 시계공은 시계밖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제네바에서는 시계공도 단순 노동자와 달리 최소한 보통 교육 이상의 지성을 갖추도록 했습니다. 가령, 교양과 라틴어까지 가르쳤습니다.” 제네바의 시계 산업이 일약 유럽 최고의 자리를 지키게 된 원인을 루소가 증언해 줬던 것이다.
이어 프랑스에 개혁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1555년에 엑상프로방스를 비롯한 프랑스 도시들에 교회가 생겼고, 칼뱅연대기까지 88명의 선교사가 파송됐다. 이후 1562년에는 교회가 2,150개로 늘었고, 프랑스 교회의 목회자 수급을 제네바 아카데미가 감당했다.
칼뱅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 난민기금’(Bourse Francsise)이라는 오늘날의 민간 NGO를 운영하고, 프랑스어 성경과 시편 찬송가 요리문답을 인쇄해 프랑스로 운송했다. 그 결과 프랑스 교회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1559년에 파리 대회와 프랑스 개혁 교회 총회를 개최한다.
이런 칼뱅의 개혁은 교육과 선교를 통해 그 역량을 세계로 넓혀 나갔는데, 심지어 브라질에까지 선교사가 파송됐다. 특별히 네덜란드에 개혁 교회가 생겨났는데, 귀도 드 브레(Guido de Brs)는 프랑스신앙고백서을 초안으로 <벨직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네덜란드 교회의 신조로 삼았다. 또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 역시 제네바에 머물며 칼뱅의 신학과 제네바교회에 영향을 받아 1563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작성했고, 이는 폴란드와 헝가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역시 제네바에 머물며 칼뱅의 영향을 받아 1564년 스코틀랜드 『시편 찬양집』을 펴냈다. 제네바성경은 잉글랜드의 표준성경이 됐다. 1648년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이 작성됐는데, 이는 청교도들에 의해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까지 연결됐다. 이처럼 칼뱅은 ‘유럽의 복음 전도자’(an evangelist of Europe)였고, 자본주의를 비롯한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많은 유산들 가운데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정신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엘시 맥키의 주장과도 같이 칼뱅은 한 지역 교회의 성실한 설교자였다. 일찍 모친을 여읜 그에게 성경은 모유의 역할을 했고, 이 인문주의 투사는 끊임없이 쓰고, 보내고, 논쟁하고, 종교회의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시민법을 비롯해서 교회법을 제정했고, 시의회에 법안을 제출하고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 결과 마침내 제네바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의 발전소가 됐고, 매우 빼어나고 아름다운 신학과 신앙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Vol.217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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