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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개혁

종교개혁의 확산과 발전

2017년 11월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남루한 수사복을 입은 작센 출신의 한 광부의 아들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의 변방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됐다. 교황청은 루터를 ‘주님의 포도밭을 파헤치는 멧돼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쓴 종교개혁 논문들은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예상을 뛰어넘는 강력한 파급력을 갖게 됐다. 그의 첫 책은 보름 만에 무려 4천 부가 팔렸고, 바르트 부르트 성에서 번역한 <9월 성경>은 해적판을 포함해 무려 66판을 인쇄했다.
그야말로 인쇄술의 혁명이었다. 모국어로 성경을 읽은 소녀와 부녀자, 농민들은 자신들이 읽은 성경으로 주교와 담대한 논쟁을 벌였고,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통해 개혁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경건한 제후와 제국 도시의 대표들에 의해 ‘프로테스탄트’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루터파는 38년 만에, 칼뱅파는 131년 만에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결코 하나를 이루지 못했다.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Colloquy of Marburg)은 앞으로 개신교회가 어떻게 분파를 이뤄 확산되고 발전할 것인가를 보여 줬다. 이제부터 종교개혁의 역사를 각 분파별로, 국가별로 살펴보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지금 비텐베르크와 제네바 운동은 어떤 의미를 던져 주고 있는지를 조명해 보겠다.


재세례파(Anabaptism)
흔히 급진주의(Radicalism)라 불리는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라인에서 가장 왼편에 위치한 운동이다.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부재 기간에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폰 칼쉬타트(von Karlstadt, 1486~1541)는 무려 405개의 논제를 가지고 에크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기행(?)에 가까웠다. 그는 신자들에게 미사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고 평상복을 입고 지내게 했다. 그리고 성상을 파괴하며 유아 세례를 철폐했다. 또 15세 소녀에게 장가들었고, 평상복을 입고 강단에 올랐다.
뒤이어 등장한 토마스 뮌처(T.Muntzer, 1489~1525)는 루터가 해체하려고 한 항목을 넘어섰다. 개혁가라기보다는 선동가로 활약한 뮌처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시 수도원을 약탈하고, 시장과 시의회를 몰아냈다. 슬로건은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했고, 농민전쟁과 힘을 합치게 됐다. 종교 혁명을 넘어 사회 혁명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렇게 비텐베르크와 취리히에서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개혁을 타협으로 보고, 혁명을 꿈꾸는 스위스 사람들이 등장한다. 재세례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취리히의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지몬 쉬툼프(Simon Stumpf), 빌헬름 로이블린(Wilhelm Reublin)이 그들이다. 이들은 엄격한 정교 분리와 교직 제도를 부정하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쟁점은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것에서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곧 ‘재세례파’로 불리게 된다. 또 이들은 군인이나 행정관으로 근무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온건한 재세례파는 체코의 모라비아에 국한됐고, 야코프 후터(J. Hutter)는 정착촌을 형성하고 생산물을 공유하는 공산주의를 실천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지상의 새 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과격한 재세례파는 독일 뮌스터에서 멜키오르 호프만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폭력적 재세례파들은 스위스에서는 스위스 형제단, 남부 독일과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에서 활동한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로마가톨릭의 신부였던 메노 시몬스가 재세례파를 지지하면서 메노나이트(Mennonite)로 발전했고, 현대에 와서는 메노나이트, 아미시(Amish), 후터라이트(Hutterite)등으로 남았다. 재세례파는 주후 313년 이전의 원시교회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청교도들이 북미로 이동했듯이 이들 역시 북미에서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로 자리 잡았다.


루터파(Lutheranism)
비텐베르크의 개혁 운동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됐지만 얼마 가지 않아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루터가 칼쉬타트의 급진주의를 수습하면서 구체적인 종교의 틀을 형성해 나갔다. 특히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며 점차 루터파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지리적으로는 독일에 한정됐고, 주로 마르틴 루터가 제시한 요리문답과 멜란히톤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
루터파는 1546년 루터가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슈말칼덴 동맹은 로마가톨릭으로 제국의 종교적 혼란을 수습하려는 칼 5세에 맞서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하고, 필립과 요한 프리드리히는 사로잡혀 독일 남부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결국 루터파의 상징과도 같은 비텐베르크는 황제의 군대에 굴복하며, 칼 5세는 직접 말을 타고 이 도시에 진입한다. 루터파는 점점 힘을 잃었고 트리엔트 공의회와 아우크스부르크, 라이프치히 임시 협정은 루터파의 색채가 옅어졌음을 보였다.
이같이 종교개혁의 시계는 오히려 중세로 회귀하는 듯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칼 5세는 물러나고 루터파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일 민족주의에 깊이 호소했던 루터파의 정체성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돼 가는 데에 오히려 장애 요인이 됐다. 특히 1560년대에 하이델베르크를 중심한 팔츠 지역이 칼뱅파의 중심이 되면서 독일 영토 안에서의 아우크스부르크 원칙은 깨지게 된다.
지머른 공 프리드리히가 팔츠의 선제후가 되면서 올레비아누스와 울시누스를 통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만들고 성인들의 형상과 성직자의 가운, 성수반, 오르간을 제거한다. 루터파는 칼뱅파의 독일 내 진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칼뱅파의 확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루터파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을 크게 미치지 못한다.



칼뱅파(Reformed Church)
비텐베르크 운동이 독일어권 운동이었고 결국 독일을 넘어서는 데 어느 정도 한계를 가졌다면, 제네바 운동은 프랑스어권 운동이었지만 스위스를 넘어 프랑스와 심지어 독일,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 헝가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는 먼저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개혁을 시작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취리히, 바젤, 베른과 같은 독일어권 도시들을 중심으로 확산됐는데, 제네바에 의해 프랑스어권의 영향력으로 대체된다. 제네바는 보(Vaud), 뇌샤텔(Neuchatel), 로잔(Lausanne)과 함께 칼뱅의 신학을 공유했고, 이런 저력은 프랑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네바는 1536년에 개혁을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파렐이었다. 파렐은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칼뱅을 설득해 함께 제네바교회 건설을 시작하지만 반발에 부딪히고 함께 추방된다. 그러나 칼뱅은 1541년 다시 제네바에서 재기했고, 3년간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면서 준비된 것을 풀어 놓았다. 칼뱅의 영향력이 커져 가면서 스위스 개혁의 중심지는 취리히에서 베른으로 그리고 마침내 제네바로 넘어오게 됐다. 1550년에 이르러서는 페랭파가 축출되면서 정점에 도달했다.
칼뱅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목회자와 시민 지도자를 양성했다. 가장 먼저 영향력이 미친 곳은 프랑스였다. 1561년 프랑스의 새로운 왕 샤를 9세는 특사를 보내 제네바에서 설교자를 프랑스로 보내지 말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이미 1562년에 가서는 프랑스에 1785개의 개혁파 교회가 만들어졌다. 그다음은 독일 남부의 하이델베르크로 영향력이 확산됐다. 1559년 성찬 논쟁에서 선제후는 칼뱅파의 입장을 받아들였고, 1561년부터 팔츠 지역에 개혁파의 신학이 전파된다. 이어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칼뱅의 영향력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칼뱅파의 영향력은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로 확장된다. 존 녹스(John Knox)는 칼뱅의 사상을 공격적으로 전한다. 특히 제네바의 콩지스투와르, 즉 치리회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대의정치의 기초를 제공했다. 즉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는 전통적 위계구조를 바꿔 버렸다.
네덜란드는 초기에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칼 5세의 후계자인 펠리페 2세가 강력한 가톨릭 입장을 고수하면서 개혁파가 점점 지지를 얻었고, 1580년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개혁파를 따른다. 특히 귀도 드 브레에 의해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는 빼어난 칼뱅주의의 신학을 보여 준다.
한편 헝가리는 독일 상인들에 의해 시민들에게 개혁 신앙이 전파됐고, 1521년에는 라코쉬 국회칙령에 의해 루터를 따르는 자는 화형에 처하게 했다. 그러나 모하취 전투 이후 나라는 셋으로 분단되고, 오스만제국의 점령 기간 동안 특히 칼뱅파의 영향력이 확대된다. 그리고 1567년 데브레첸에서 2차 헬베틱 고백이 채택되고, 1568년 트란실바니아 국회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다. 이렇게 칼뱅파의 영향력은 1590년대가 되자, 서유럽에서 의심할 바 없는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영국 성공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
한편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태동한다. 중심에 헨리 8세가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가 헨리 8세가 낳은 딸 메리 튜더와 결혼을 거부하자 헨리도 캐서린과의 이혼 절차를 밟게 된다. 급기야 헨리 8세는 앤 불린(Anne Boleyn)과 사이에 자녀를 갖게 되고, 결국 로마와 결별하고 수장령(the Succession Act)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브리튼 섬에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이어 1547년에 헨리 8세가 죽고 에드워드 6세가 새 왕이 되면서 크랜머와 함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죽자 피의 메리가 역사를 되돌려 버렸다. 미사와 성직자의 독신 의무가 다시 시작되고,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로 돌아갔다. 크랜머와 리들리가 옥스퍼드에서 공개 처형되고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은 스위스와 독일, 프랑스로 흩어졌다. 그러나 1558년 메리 튜더가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종교는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성공회(Anglican Communion)라는 독특한 개신교를 형성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죽자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의 후계자로 공포됐기 때문이다.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 성경을 출간하고 문화적으로 느슨한 정책을 폈다. 이런 태도는 이른바 청교도(Puritan)들을 자극했고, 결국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스코틀랜드도 수도원 중심의 오랜 가톨릭 국가였지만 16세기 대학을 통해 종교개혁이 유입된다. 그러나 잉글랜드보다는 25년 늦게, 그리고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가장 늦게 진행됐다. 1558년 제네바에서 귀환한 존 녹스를 중심으로 개혁이 확산됐고, 1560년에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 함께 자신들의 교회를 장로교회라 불렀다. 이후 존 녹스에 의한 ‘제1치리서’, 엔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을 통한 ‘제2치리서’가 작성되고, 스코틀랜드는 명실상부한 장로교 국교회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를 거치면서 장로회와 주교제가 혼합된 형태를 지녔고, 공동 기도서는 1638년 ‘국민언약’을 낳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국왕파와 국회파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의 국회와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엄숙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마침내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개최된다. 총회는 151명의 총대로 성직자 121명,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으로 구성됐고, 무려 5년 반 동안 1,163번의 회의를 통해 장로교 정치와 예배 모범, 시편 찬송과 신앙고백서, 대소요리 문답을 채택하고 1649년 폐회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포괄적이고 안정적인 모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교회사의 한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때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존의 신앙고백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장로교는 물론 교파들마다 약간의 수정을 가해 사용하고 있는 표준 문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기독교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향한다. 로마가톨릭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식민지로 건설한 나라로 이전했고,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대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이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몇 달 안에 장로교에서 회중 정치 체제를 선택했고, 급기야 미국은 모든 기독교의 실험장이 됐다. 백인에 의한 대륙 이동의 대표적인 사례인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이룬 신앙적 성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1618년 제임스 1세의 ‘스포츠 및 오락에 관한 규정’을 견딜 수 없었다. 청교도 목사들은 이 규정에 반발해 강론 말미에 ‘안식일을 기억해 거룩히 지키라’를 덧붙였다. 결국 청교도는 재세례파와 같이 섬에 갇혔고 청교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 됐다.
그러나 유럽이 국가 교회로 머무는 동안 미국은 각 교파가 정체성을 세워 가며 특징 있는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부흥’과 ‘각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전 시대의 교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교회사를 전개했다. 여기에 17세기 합리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 사조가 인간의 사상 체계에 뿌리를 내리면서 각 분파는 이전 세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에 의문을 품었고, 분파의 색채 또한 옅어졌다.
17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와 18세기 영국의 부흥 운동, 19세기 미국의 부흥 운동, 그리고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 정통성의 운동이라기보다는 각 시대의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인 응답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청교도 이후의 기독교는 국가주의가 배제됐다. 근대국가가 교회에 제공한 종교의 자유는 교회가 어떤 힘과 싸워야 할 열정을 인간 개인의 상황과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 더 이상 성찬의 일치도 필요치 않게 됐고, 특정 분파가 특정 분파를 제거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동시에 정통주의(Orthodoxy)도 없어졌다. 더 이상 군주의 결정도, 시의회의 결정도 종교에 영향을 줄 수 없게 됐다.
바야흐로 이제 현대는 탈종교 개혁의 시대를 맞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현대 교회는 상황(Context)에서 다시 경전(Text)으로 돌아가야 한다. 탈권위 시대가 진리마저도 걸러 내고, 구원마저도 폐기할 때, 종교개혁 500주년의 모멘텀(Momentum)은 정경으로 돌아갈 기회인 것이다.



Vol.218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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