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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과 같은 열여덟 살 소녀 열사, 유관순의 흔적 -병천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에서

2018년 04월 이소윤 작가_ 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봄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 차지만, 자연은 어김없이 창조의 순리를 따라 쌓였던 눈을 녹이고 꽃을 피운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 때문이다. 죽은 듯한 땅에서 피어나는 여리디여린 싹을 볼 때의 황홀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창조하신 생명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 것인지를 잠시 느끼게 해 준다.
이맘때쯤이면 한 번쯤 찾아가 보고픈 곳이 있다. 바로 새봄처럼 빛나는 열여덟 해의 삶을 신앙과 나라를 위해 바친 유관순 열사의 고향, 충청도 천안시 병천이다. 병천의 주산인 매봉산은 유관순 열사 관련 유적사적 제230호 사료로 지정돼 있다. 이 산기슭에 매봉교회의 기원이 된 작은 교회가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이다.


신앙 공동체이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매봉교회
1890년대, 인천과 부산을 통해 물밀 듯이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한 선교사들은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한반도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미국에서 온 감리교 선교사 윌버 스웨러(Wilbur. C. Swearer, 한국명 서원보)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1898년 스웨러 선교사가 서울에서 여주를 거쳐 충청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병천에 복음을 전하고 ‘지령리소교회’(대지령야소교당)를 세웠다.
그 후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 선교사 부부가 공주를 왕래하면서 이들의 사역을 도왔고, 1901년 박해숙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의 부흥이 시작됐다. 바로 그 무렵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민족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유중권 집에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 바로 유관순이다.
이후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탄압이 심해지면서 매봉교회는 혼란한 시대에 의지할 곳 없는 조선 백성을 돌보는 역할을 감당하며,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국채보상운동(1907년)에 적극 참여한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두 번이나 교회에 불을 질러 성도들을 탄압했지만, 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교회를 세워 신앙을 지켜 나갔다. 이에 감동한 독립운동가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합류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유관순에게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유관순
그즈음, 유관순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로버트 샤프 선교사의 아내 앨리스 샤프(Alice Sharp, 한국명 사애리시)였다. 남편인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공주와 천안을 오가며 선교를 하던 중 남편이 이질에 걸려 순교했다. 한국에 온 지 겨우 3년여 만에 남편을 잃고 자식 하나 없이 홀로 낯선 이국땅에 남겨졌지만, 앨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편이 못다한 사역에 더욱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당시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을 친자녀처럼 돌보기도 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유관순은 자신의 뒤를 이어, 한국 여성 교육과 사회 사업을 이끌어 갈 재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자신이 설립한 영명여학교(현재 영명고등학교)에 13세의 유관순을 입학시켜 2년간 공부시킨 뒤, 1916년에는 이화학당에 ‘교비생교사’가 되는 것을 조건으로 입학한 장학생 신분으로 편입하도록 돕는다.
당시 이화학당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한국 최고의 여성지도자를 배출하는 요람으로서 탁월한 목회자와 민족 운동가들이 교육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관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정동교회 손정도(1882∼1931) 목사와 이화학당 선배이자 교사였던 박 인덕이었다. 두 사람을 통해 유관순은 신앙과 나라사랑이 하나임을 배우게 된다.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
당시 학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홀로 예배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유관순은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신앙부흥회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견고하게 다져갔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민족지도자들이 탑골공원에서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외친다는 소식을 들은 유관순은 학우들과 함께 탑골공원에 나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학생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이 불길처럼 번지자, 일제는 휴교령으로 대응했다.
이에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가 교회 교인이며 지도자인 조인원과 아버지 유중권 등과 함께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때 유관순은 지역의 어른들을 설득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구하기 위해 서울을 오가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도왔다. 거사 전날 밤,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간절히 기도를 올린 뒤, 봉화를 올려 인근에 거사를 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디어 음력 3월 1일인 4월 1일, 전국에서 가장 대규모로 열린, 격렬했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이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3천여 명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유관순은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일제가 총칼로 무력 진압에 나섰지만 시위대는 끝까지 멈추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과 유중권 부부, 그리고 오빠 유우석 등 10여 명이 순국했다.
당시 유관순은 17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주모자인 유중무, 조인원 등과 같이 “시위의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다른 이들은 풀어주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을 뿐 아니라, “강제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고 따지고 물으며, 오히려 총칼로 시위를 진압한 일본군을 꾸짖기도 했다.
이런 유관순의 태도가 다른 이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한 일본 재판정은 어린 소녀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미성년자에 불과했던 유관순을 일본군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반증한다.


옥중 생활과 순국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만세운동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옥중에 있던 은사 박인덕을 비롯한 민족 지사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해, 방광이 파열되도록 고문을 당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유관순은 집에 홀로 남겨질 동생들을 걱정했을 뿐, 자신의 생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겨우 열여덟 살의 나이로 교도소에서 순국한다. 유관순의 유해는 이화학당 프라이(Miss Lilu E.Frey) 교장과 교사 월터(Miss Althea Jeannette Walter)에 의해 수습돼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숨을 거두기까지 그녀가 보여 준 의연한 태도와 심지 굳은 말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지만, 그중에서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한마디가 있다.
“나라를 위해 드릴 목숨이 하나뿐인 것이 한입니다.”
만세운동 이후 교회는 다시 일본군에 의해 전소됐다. 거기에 집회까지 금지당하면서 성도들은 예배를 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일제강점기 충청도 지역 신앙의 중심이자 독립운동의 심장부였던 매봉교회도 잊혀졌다.


돌아온 매봉교회
매봉교회가 다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 17년이나 지난 뒤인 1962년이다. 이 해에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그즈음 이화여고는 유관순의 고향 지령리와 자매결연을 맺은 뒤, 매년 성경학교를 열고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이화여고 개교 80주년이 되던 1967년 이곳에 다시 교회를 세우고, 매봉교회라 이름 붙였다. 그 옆에 유관순의 생가도 복원했다.
매봉산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도 조성됐다. 태극기가 가득한 공원의 이끼 낀 돌계단을 오르면 이화여고 학생이 지었다는 짧은 헌시가 발길을 붙든다.

그대 꺾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이곳에 우뚝 섰다
아! 미치도록 그리운 조국의 독립으로
이 땅의 해맑은 웃음 이루려
씨 틔어 흩날리나니
- 이화여고 김희정


Vol.223 201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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