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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에서 잊혀져 가는 순교자를 만나다 - 모슬포교회에서 대정교회까지

2018년 05월 이소윤 작가_ 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지난 3월말, 제주도에는 때아닌 한파에 강풍까지 겹쳐, 한겨울로 되돌아간 듯했다. 한라산 꼭대기에서부터 들녘과 숲까지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하늘마저 온통 잿빛 구름으로 덮인 날, 대정에서 조수리로 가는 중산간 도로를 오르고 있던 순례자는 끝내 길거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국의 기독교 성지를 발로 종주하기 위해 나선 첫날, 순례자를 침몰시킨 것은 한파도 바람도 아니었다.
1908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첫 교회를 개척한 이래, 이기풍, 최흥종과 같은 당대 최고의 목회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제주도에는 각 지역마다 교회가 들어섰다. 1920년대, 평양 장대현교회의 성도가 약 300명 남짓일 때 모슬포교회의 성도는 400명이 넘었을 만큼 뜨거운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로부터 1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제주도에는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는 길을 잃고 주저앉아야만 했다. 사시사철 올레길을 걷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이가 몰려오고, 큰길은 물론 골목골목까지 크고 작은 관광명소를 안내하는 안내판은 많았지만, 정작 의지할 데 없는 섬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이의 흔적을 안내하는 이정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주도 최초의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의 순교터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모슬포교회와 ‘제주도의 쉰들러’ 조남수 목사
순례자의 여정은 모슬포교회에서 시작됐다. 굳이 이기풍 목사가 세운 최초의 교회들이 있는 제주도 지역을 제쳐두고, 먼저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60여 년 전 섬사람들과 생사를 함께한 두 명의 목사와 관련된 유적 때문이었다. 제주시 남서쪽 모슬포 해안에 위치한 모슬포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4·3 사건, 한국전쟁 등 격변의 시대사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지역을 섬겼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적 교회다.
1909년 가을, 이기풍 목사가 개척하고 2대 윤식명 목사가 기초를 다졌다. 윤식명 목사는 그를 집단 폭행한 과격한 신흥 종교와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전도 활동으로 교회를 성장시켰고, 조선의 광복을 염원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광선의숙’(光鮮義塾)을 설립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신앙과 독립 정신을 심어 줬다.
지역의 정신적인 심장부로 성장하던 모슬포교회는 해방 후 제주도를 대혼란에 빠뜨린 4·3 사건과 함께 순교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처음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정치 이슈가 식량난과 겹치면서 폭동으로 변했다. 이를 단순히 정치적 시각으로 본 미군정이 폭동을 무력으로 제압하자, 반미 감정이 극대화되면서 기독교를 향한 적대 감정으로 번졌다. 수십 명의 성도들이 순교했고, 조수·세화·삼양·협재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 와중에, 모슬포교회 8대 목사로 부임한 조남수 목사는 죽을 위기에 처한 3천 명의 목숨을 살려 내는 기적을 만들었다. 4·3 사건 당시, 일반 주민들 중에는 밤에 들이닥친 무장대에게 어쩔 수 없이 쌀과 돈을 준 이가 많았다. 그런데 경찰이 무장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쌀과 돈을 준 주민들의 명단을 발견하고, 무장대 동조세력으로 간주해 토벌하려고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남수 목사는 경찰서장을 찾아가 ‘살기 위해 쌀과 돈을 준 것이며 절대 동조자가 아니니, 자수를 하는 사람은 살려 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 냈다. 그리고 직접 자수를 권유하는 순회 강연에 나섰다. 대정에서 출발해 한림과 서귀포까지 약 150여 회의 강연을 계속했다. ‘자수를 했다가 처벌을 받으면 내가 목숨으로 그 빚을 갚겠다’는 결연한 태도로 강연하는 조 목사를 신뢰한 이들이 하나둘 자수했고, 무장대의 압력으로 ‘전단지’를 돌려서 ‘용서불가’ 낙인이 찍혔던 대정읍 주민들까지도 설득과 협상을 통해 자수해, 목숨을 살렸다.
여기서 목숨을 건진 이들 중 상당수가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고, 이후 모슬포교회는 조남수 목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150명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모슬포교회 옆에는 지역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가 있다. 지역 주민들이 세운 것치고는 나름 정성을 들인 것이 엿보이기는 하나, 3천 명의 목숨을 살린 사람의 공덕비라기엔 너무도 초라한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평생 글만 읽으며 제자들만 가르친 사람의 묘비만도 못한 목사님의 공덕비. 그분의 삶을 제대로 잘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복음 전파의 힘이 있을 텐데, 출입문은커녕 이렇다 할 이정표 하나 없이, 트럭과 버스가 계속해서 오가는 대로변에 이대로 둬도 되는 것일까? 순례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조남수 목사, 초야에 묻혀 지내던 이도종 목사를 불러내다
조남수 목사는 이도종 목사의 생애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도종 목사는 제주 노회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굴복하자, 곧바로 교회를 사직하고 초야에 묻혔다. 강직한 성품의 이도종 목사를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한 이가 아들 뻘 되는 조남수 목사였다.
그즈음 4·3 사건이 터졌다. 사태는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지만 이도종 목사는 그 와중에도 심방을 멈추지 않았다.
제주도 토박이로 제주도에 복음을 전한 매서인 이덕련의 아들로 태어난 이도종 목사는 어렸을 때부터 밝고 유쾌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난한 섬에서 2대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생활은 무척 곤궁했지만, 이도종 목사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성도들에게 복음의 비밀과 소망을 전해 주는, 타고난 복음 전도사였다. 그런 그는 무장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다녔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고문으로 다리를 다쳐 걷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있었던 1948년 6월 18일에도 그는 자전거를 타고 심방길에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걱정하는 동생에게 믿는 사람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격려하며,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안을 잘 돌보라’고 당부하고 길을 떠났다. 그날 그는 행방불명됐다. 가족과 조남수 목사 그리고 성도들이 필사적으로 찾았으나,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히 무장대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1년여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에게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체포된 무장대원의 진술 가운데 이도종 목사에 관한 내용이 나온 것이다. 그렇게 1년 만에 수습된 이도종 목사의 유해는 대정읍교회에 안치됐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대정읍교회는 한편에 아담한 숲을 조성하고 그 아래 세 개의 비석을 세웠다. 왼쪽은 유해 봉안비이고, 가운데는 노회에서 세운 순교기념비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비석은 1957년 교인들이 이도종 목사의 순교 장소인 삼방산의 돌을 캐어 내서 만든 것이다.


잊혀 가는 순교자의 유적지에 서서
모슬포교회에서 시작된 순례길은 대정교회를 거쳐 이도종 목사의 순교터로 이어졌다. 하지만 대정교회에서 순교터로 가는 길 어디에도 이렇다 할 이정표는 없었다. 순례자는 그저 운좋게 그 순교터를 발견한 순례자들의 블로그를 참고로, 그곳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백미터 앞에서 1시간여를 더 헤맨 끝에 겨우, 이도종 목사의 순교터를 찾았다. 하지만 차라리 보지 말고 지나쳤으면 싶을 만큼, 순교터의 모습은 심각했다. 마침 인근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사로 인해 순교비는 흙탕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이 공사가 끝난다 해도 순교비의 상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4·3 사건 당시 체포된 무장대원의 진술에 따르면 이도종 목사는 대정읍 인향동 골짜기를 넘어가던 중, 바로 이곳에서 무장대에게 붙들렸다. 그의 소지품에서 성경책을 발견한 무장대는 곧바로 땅을 파고 그를 생매장했다. 그때 이도종 목사는 갖고 있던 성경책과 찬송가, 그리고 회중시계를 무장대원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가니 더 이상 이것은 내게 필요 없네. 자네들에게 선물로 줄 테니, 이제라도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무장대들이 흙을 덮어 몸이 점점 흙 속에 잠길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해 심방을 가던 길, 자신을 생매장하는 폭도들의 영혼을 걱정하며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린 순교자의 유적지가 방치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민들이나 여행자가 천만이 넘는 한국 교회를 어떤 눈으로 볼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훗날 이곳을 지날 때, 작은 이정표 하나라도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슴에 새기며, 순교자의 유적지에 붉은 석양이 드리우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Vol.224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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