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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 - 자기 부인과 내려놓음, 작아지고 힘 빼고 숨는 훈련

2019년 03월 박희석 목사_ 광주사랑의교회

광주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18년이 돼 간다. 그동안 수백 명의 형제자매들이 제자훈련을 받아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하고, 개인 사정으로 타 교회로 떠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도 교회 구석구석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특히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갖게 되는 제자훈련 수료식은 목회자로서 1년을 돌아보며 큰 보람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제자훈련을 수료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수료증과 함께 꼭 전달하는 선물이 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이 담긴 수료패다. 비록 간결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 제자훈련의 핵심 영성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자기 부인, “나는 날마다 죽노라”
제자훈련은 한마디로 ‘자기 부인’과 ‘내려놓음’의 훈련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 어느 정도 준비됐을 때 제자로 부름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순간’ 제자로 부름받는다. 아직 제자로서의 진면목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지, 제자로 부름받는 일에는 예외가 없다. 그래서 훈련을 통해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갖춰 가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제자훈련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진면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한두 번 참여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일평생 스스로를 훈련해 나가야 한다. 문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바울도 오죽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겠는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소위 출세의 길을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몽골을 거쳐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하고 계신다.
작년에 열린 일본 코스타에서 교제할 기회가 있었는데, 선교사님이 우스갯소리로 그 책을 괜히 출판해 사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고 말씀하셔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다. 선교사님이 그 정도인데 세속 일터에서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자기 부인과 내려놓음
오래전 자기 부인과 내려놓음의 의미를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시켜 준, 예수님의 비유 하나를 누가복음 17장에서 접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이 비유만큼 잘 드러내는 이야기도 없다고 생각해 소개한다.
한 종이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쉬라고 말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하는 시간 동안 서서 시중을 들라고 한다. 하루 종일 일을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러나 주인은 종의 피곤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주인의 태도에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종은 주인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는 말, “수고했다”라는 이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종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종에게는 그 어떤 작은 보상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이렇게 마무리하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절).
제자의 삶이 이렇다 할 때, 과연 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쁨으로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물으며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서울 강남에 있는 어떤 큰 교회로부터 설교 부탁을 받고 간 적이 있다. 오랜만에 접하게 된 강남역은 번화가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높은 빌딩과 명품점이 들어섰고, 멋쟁이 신사들과 매력적으로 차려입은 직장 여성들이 길을 메우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불쑥 나왔다. “하나님, 나도 이런 곳에서 좀 목회할 수 없을까요? 이만하면 제 설교도 강남에서 통할 것 같고, 비주얼도 좀 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광주에 왔다고 했지만, 아마도 내 마음속에는 서울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번개 치듯이 내 마음을 울리는 말씀이 있었다. 너무나 선명하게 들리는 말씀이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사실 이럴 때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9a)와 같은 말씀이 떠올라야 은혜가 될 텐데, 뜬금없이 떠오른 말씀은 빌립보서 2장 말씀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너 제자훈련 하는 목사잖아? 그렇다면 너부터 나를 따라와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지하철역에서 나와 설교하는 교회까지 걸어가는 길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그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저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라. 상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라. 어떤 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셨다면, 분명 예수님은 폭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기 부인’이 무엇이고, ‘내려놓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하늘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십자가의 자리까지 낮아지시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포기했다고 한들,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신 예수님만큼 포기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낮아졌다고 한들 예수님만큼 낮아지겠는가?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허물어져 가던 내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그날 다시 한 번 단단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님의 흔적이 보이는 삶
젊은 의사 안수현 형제를 소개한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있다. 이 형제는 33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 젊은이의 장례식에 자그마치 조문객이 3,000명 이상 온 것이다.
이 의사는 좀 특이한 의사였다. 진료가 끝나고 나서도 퇴근하지 않고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휠체어에 의존해 있는 환자를 자신의 차에 태워 공연도 함께 보러 가고, 환자가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게 되면 조문을 가서 유족들을 위로해 줬다. 어린 소녀의 병실에 찾아가서는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안수현 형제의 이메일 아이디는 ‘스티그마’(Stigma)였다. ‘스티그마’는 헬라어로 ‘흔적’이라는 뜻이다. 안수현 형제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남기 원했다. 그런데 이 ‘스티그마’라는 헬라어는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주인이 노예의 몸에 자기 소유인 것을 인치는 낙인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안수현 형제는 ‘나는 영원히 예수님의 노예’라는 뜻으로 이 아이디를 사용한 것이다.
옛날 헬라 시대의 노예는 인격도 없었고,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그야말로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당나귀는 말을 할 줄 모르는 노예고, 사람은 말을 할 줄 아는 노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노예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안수현 형제는 기꺼이 예수님의 노예로 한 생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고, 자신의 이름 앞에 스티그마라는 아이디를 달고 살았던 것이다.
지난 1월 14일 전국 CAL-NET 신년교례회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릴 때, 2019년 새로 CAL-NET 대표로 추대되신 대전새중앙교회 이기혁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게 됐다. 그 설교 말씀이 강하게 내 가슴에 와닿았다.
“짐승은 지나가고 나면 냄새를 남기지만 사람은 흔적을 남긴다. ‘흔적’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지나간 자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예수님의 흔적만 남는 것, 나의 영광이나 수고, 헌신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이 존귀하게 되는 것, 예수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제자로서의 자기 부인이며 내려놓음이 아니겠는가?
헨리 나우웬은 자기 부인과 내려놓음을 ‘희미해지는 훈련’이라는 표현하며 의미심장한 세 가지의 실천 사항을 언급했다. 작아지는 훈련(Littleness), 힘 빼는 훈련(Powerlessness), 숨는 훈련(Hiddenness)이다. 제자는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힘을 가지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를 통해 예수님만 보여야지, 자신의 모습이 흔적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

광주사랑의교회에서 2년 전에 교회를 분립했을 때, 분립 교회 주변 교회 목회자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여기도 교회가 많은데 왜 또 들어오느냐”고 항의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가 필요해서 교회를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려고 분립했습니다. 스스로 작아지고 힘을 빼고 숨는 훈련을 함으로써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분립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모든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면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터인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그 면류관을 벗어서 예수님의 발 앞에 던져 드린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생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일생 동안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던 삶을 살았던 흔적과 구원의 영광을 예수님께 올려 드리는 시간이다. 이 땅에서는 그 어떤 편안함도, 위로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예수님의 노예로 사역하다가 예수님께서 계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그 구원의 면류관조차 예수님께 벗어 드리는 삶이 바로 제자의 삶이다.

 


 

박희석 목사는 총신대학교, 미국 커버넌트신학교(M. Div.), 리폼드신학교(D. Miss)를 졸업하고,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했다. 현재 경기도 광주에 있는 광주사랑의교회에서 담임목사와 총신대학교 조교수, 경기 CAL-NET 대표로 섬기고 있다.

Vol.233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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