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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왜 안 될까? (Why Not Us?)

2024년 07월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오정현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주사파가 대한민국을 뒤집어 놨습니다. 그런데 천만 성도 수를 가진 한국 교회는 왜 그렇게 못합니까?”

이는 전향한 주사파의 거두(巨頭)였던 분을 얼마 전에 만났을 때 그로부터 들었던, 지금도 가슴에서 휘몰아치는 인상 깊은 말 중 하나다.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앙처럼 여겼던 주사파들은 기독교 진리를 자기 식대로 왜곡해 세상의 이념적인 지형을 바꿔 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깊은 영향을 끼쳐, 지금도 그 여진(餘震)이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을 들쑤시며 충격을 줬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본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복음을 전했던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다(행 17:6). 

2,000여 년 전, 소수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 당시 탐욕과 우상으로 층층이 굳어진 사회 시스템을 복음으로 전복시켰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보다 수십 또는 수백 배의 인구를 가진 한국 교회가 복음의 선한 영향력으로 우리 사회를 뒤집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교회의 시선이 너무 내부를 향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변화되기 전의 사도 바울은 시선과 가슴이 지극히 좁았다. 율법적인 안목에 갇혀 있었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심중에는 언제나 정죄의 대상들을 향한 분노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율법처럼 여겼고, 은혜에 기초한 복음의 혁명성으로 균열을 보이는 사회 현상에 격분했으며, 자신의 생각에 반(反)하는 대상은 누구든 공격하거나 심지어 죽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도 자신만의 생각에 붙잡혀 분기탱천한 바울처럼 자기 의에 갇힌 채, 강단에서조차 다른 목회자들을 비판하며 심지어 정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위 유체 이탈 화법을 구사해 한국 교회의 문제가 자신과는 상관없으며, 그런 것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을 업(業)처럼 여기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면이 강하다. 

이들에게서는 자녀의 고통으로 인해 가슴은 피멍이 들고 눈물을 삼키는 어미의 심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진정한 가족이라면 본능적으로 같이 울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사도 바울이 자기 의의 껍데기를 깨고 세상을 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에 굴복하면서부터다. 복음의 불에 진정으로 붙잡힌 사람은 그 열기를 세상으로 발산하게 돼 있다. 예수님의 피의 복음에 깊이 젖은 사람은 누군가를 향한 비판이나 정죄로 머뭇거릴 여지가 없다. 십자가에 붙들린 참된 신앙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교회 안에만 머물며 서로를 향해 질시와 정죄를 퍼붓고 천금 같은 시간과 힘을 누수할 것인가? 복음의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에 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이 열릴 것이며, 한국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무한한 가능성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교회와 성도는 진정한 의미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로 세워져 반기독교적이고 무신론적인 우리 사회에 복음의 균열을 일으키고, 세상의 쇠와 놋과 은과 금을 부서뜨리는 거룩한 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Vol.292 202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