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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 ⑩ “스승처럼 다른 사람에게 의미 주는 삶을 살고 싶다” -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컨설턴트 정세열 교수

2006년 06월 우은진 기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는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에게 애정을 줄 때, 얼굴이 피어나고 빛이 나게 된다. 남자와 여자사이, 부모와 자녀사이 그리고 스승과 제자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으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대우를 받는다는 것,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옥한흠 목사로부터 많은 배움과 영향을 받은 청년들은 하나같이 옥한흠 목사에 대한 강한 애정과 존경을 표시한다. 옥한흠 목사 편에서 보면 공평한 사랑이었을텐데, 받는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만큼은 특별한 사랑으로 간직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이 옥 목사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옥한흠 목사가 그 시절 성도교회 대학부 청년들의 삶에 미친 영향력은 쉽게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 중에는 현재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로 있는 정세열 박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대놓고 옥한흠 목사와 자신은 아주 절친한 사이이며, 주위에서 시샘을 할 정도로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은 스승과 제자사이라고 웃으며 귀띔 한다.


옥한흠 목사와 1년 반 동안 함께 한 특별한 제자훈련
성도교회 대학부 5기(74학번 또래) 출신인 정세열 교수. 성도교회 대학부 1기부터 4기까지의 제자훈련은 선후배간에 맨투맨 형식이나 리더가 후배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옥한흠 목사가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주며 짧은 메시지 및 수련회와 함께 삶이 어우러진 비체계화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기 제자훈련생들은 옥한흠 목사가 1년 반 동안 직접 제자훈련을 한 특별한 혜택을 누린 기수가 됐다.
정 교수는 어릴 적부터 오래 된 친구 김종욱과 절친해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자주 그의 집에 놀러갔었다고 한다. 3학년 말이던 어느 날 이 친구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대학에 들어가면 교회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성도교회 권사였던 그의 어머니께 드렸는데, 성도교회 대학부를 자랑하시며 정 교수에게 적극 권했다. 그래서 대학입학 시험을 치른 첫 주일부터 자신의 발로 성도교회 대학부로 찾아 들어갔다.
그 때 마음 한 켠에서는 동정녀 탄생 등을 믿는 대학부의 청년들이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면서도 순수해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다. 대학부에 나간 첫 3, 4주는 주 중에는 술친구들과의 생활과 주일날 교회생활이 엉켜졌었는데, 옥한흠 목사가 선배들과 함께 집으로 심방을 왔다고 한다. 그때 집에 있던 찬송가와 성경책을 가리키며 언제까지 보지 않고, 꽂아만 둘 것인가라는 질책과 같은 권면을 듣게 되었다.
그날 밤부터 정교수는 위풍이 센 조그만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요한복음과 시편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칠흙과도 같이 캄캄한 자신의 마음에 마치 바늘구멍과 같은 틈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회심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경험케 한 대학부 공동체
그 후 1주일 동안 저녁을 먹지 않고, 어머니와 누나가 걱정을 할 정도로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결국 예수를 믿기로 굳게 작정했다. 한 주만에 저녁을 다시 하게 된 자리에서 당시 이화여대에 다니던 연년생인 누나에게 그 때까지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고, 그 후로는 누나로 불렀다고 한다. 한편 누나에게 ‘예수 그렇게 믿으면 안 된다’고 권면하여 누나(현재 성도교회 권사)도 성도교회 대학부에 함께 나갔다고 한다.
대학생활이 막 시작될 무렵 방선기 선배가 5기 남학생들을 불러 놓고 에베소서 1장과 2장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특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장 11~12절)는 말씀은 5기 후배들에게 감격과 신선한 도전이 되었다고 한다. 방선기 선배를 통해 고무된 5기들은 바로 옥한흠 목사를 찾아가 직접 제자훈련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대학부 5기는 옥한흠 목사와 직접 삶과 말씀을 나누는 제자훈련을 통해 끈끈한 사이가 됐다.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된 제자훈련은 옥 목사가 유학 가기 전까지 무려 1년 반 동안 지속됐다. 정 교수는 옥 목사님께서 “아는 거 모르는 거 다 알려주고 간다”고 하셨을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은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성경강해 중심으로 3시간 가까이 성도교회 구 교육관 2층에서 진행된 제자훈련은 본문예습은 물론, 암송, 큐티 등의 숙제검사, 어려운 질문 등으로 즐거운 주말이 되어야할 토요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정 교수는 당시 대학부 시절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복된 기간이었다고 자부한다. 옥 목사로부터 정기적으로 복음과 말씀을 배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유신체제로 인해 2학년 봄 휴강 때 이른 아침에 교회에 모여 옥 목사로부터 시편강해를 듣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시편 23편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안에 풍성히 부어지는 부흥을 체험했다고 밝혔다. 더불어 대학부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한 소중한, 아니 가장 복된 경험을 하게 한 신앙의 고향이 됐다고 한다. 특히 성도교회 대학부 4년 동안 옥한흠 목사뿐만 아니라 인격과 삶의 본을 보이면서 영혼의 날개가 자라는 듯한 감격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한 김성환 담임목사 및 박윤선 목사 등 세 분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고 회상했다.

 

복음을 가르치고 동시에 사랑을 듬뿍 주신 스승
정 교수에게 옥한흠 목사는 목숨보다 소중한 복음을 소개하고 가르친 영적 어머니이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일깨워준 고마운 은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서로가 평생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김춘수의 시에 나오는 꽃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추억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한복음, 로마서, 요나서 강해 등과 함께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한 수련회에서 옥 목사로부터 들은 “생명, 교제, 기쁨”이라는 제목의 요한일서 강해는 삶 및 교회관과 연결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기억했다.
또한 그는 옥 목사에게 1년에 두 번은 점심을 얻어먹을 자격이 있다고 큰 소리쳤다. 이유인즉, 75년 옥 목사가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 영문 타자기를 주고 가셨는데, 그것을 2004년 사랑의교회 은퇴 기념 선물로 다시 되돌려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옥한흠 목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한마디로 ‘형편 없으셨다’며 유머를 날린다. 그는 “옥 목사님께서 자주 ‘나는 내 이름과 같이 한없이 흠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표현하셨는데, 이는 옥한흠 목사님의 겸손함과 솔직함을 가장 잘 드러낸 표현이다”라고 소개했다.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지금은 소천한 어머니가 사랑의교회 초장기 초대 권사와 순장으로 활동했을 때, 그리고 사랑의교회가 성장한 이후까지 계속 옆에서 옥한흠 목사를 지켜봐 온 그는 복음과 말씀 전하는 것에 관한 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는 분이라고 스승을 평가했다.
교회 초창기에는 창립 맴버로서 자주 새벽기도회에 나갔는데 목사님마저 나오시지 않은 날은 옥 목사의 집으로 찾아 가 사모님께서 차려 주신 아침밥을 먹고 옥 목사가 직접 끓인 원두커피를 함께 마시기도 했으며, 교회 규모가 작았기에 옥 목사가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면 수련회 교재도 만들었고, 가끔씩 옥 목사의 고물 중고차를 타고 교인 심방에 동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함께 한 추억이 많았고, 옆에서 스승을 지켜보며 인간적인 면모도 가까이서 많이 접했다.
그는 옥 목사가 중요한 영적인 또는 세상적인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결단내리는 모습을 자주 목도했으며, 이런 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정 교수는 기독교계 유명 지도자들이 폐쇄적인 면모가 많은 반면, 옥 목사가 열린 카리스마를 지금까지 지니고 계신 점은 감사하기까지 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87년에 옥 목사님께서 소형차에서 처음으로 중형차로 바꾸었을 때, 청년들이 연판장을 만들어 비서실로 팩스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한번 화내시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셨고, 내가 교회 건의 사항을 편지로 써서 드리면 빨간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고 하실 정도로 반대 의견에도 열려 계셨던 분”이라는 일화를 소개했다.
무엇보다 대학부 시절부터 옥 목사는 믿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전적으로 믿고 맡기며 무엇이든지 위임 하셨다고 한다. 그 역시도 그런 위임을 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학부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옥 목사의 신뢰와 편애(?)로 인한 시샘 아닌 시샘도 받았다. 또 스승은 대학부 시절부터 얼굴까지 붉혀가며 논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집에 가지 말라고 붙들고 서재에 앉아 자주 밤새워 청년들과 토론하는 분이셨는데, 감정의 앙금 따위는 절대 남기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경제학 박사학위보다 인생 박사학위를 딴 시기
학부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하고, 곧바로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메이첸(J. Gresham Machen, 프린스턴신학교 신약학 교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창설자의 한 사람)의 글과 삶에 매료됐었다. 그래서 대학원 시절 신약학을 평생 공부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이 문제로 옥 목사와 상의하기도 했는데, 대학원 2학년 크리스마스 전날 아침에 옥 목사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함께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면서 평신도로서도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경제학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됐다. 사실 그는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아버님과 함께 대학부 시절부터 옥한흠 목사의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 그 한 가운데서 타이프를 치던 스승의 모습에 영향을 받아 공부쪽으로 일찍이 방향을 잡았다. 늘 말씀과 교재 준비에 목숨을 걸다시피 철저히 준비하던 스승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그에게도 공부하는 것을 고되지만 즐기게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 밝히기는 힘들지만, 대학시절에 자신에게 찾아 온 독특한 어려움으로 그 이후 많은 고통을 겪기도 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이 자신의 영성을 자라게 하는 데에 귀한 연단의 도구가 되었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대학원 졸업 후 3년 동안 군대생활을 통해서 얻은 많은 유익과 함께 귀한 믿음의 친구 및 선후배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캐나다 리젠트대학에서 1년간 신학을 공부한 후, 미국 워스콘신(메디슨)대학교 및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은 예상 외로 길어져 8년 넘게 북미에 머물렀고 학위를 받는 데에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는 이 기간은 경제학 박사학위보다 인생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시기였다고 고백했다.
귀국 후에 주로 연구소에서 일한 그는 99년 7월부터 경제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약 3년 반 동안 활동했다. 그러나 연구와 가르치는 일이 더 체질에 맞았던 그는 다시 국책연구소나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신문사를 나와 서강대에서 2년 반 동안 계약교수로 있으면서 3년 가까이 전임 교수나 연구원으로 가는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원하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고, 그리하여 지난 3년 동안 마음에 깊은 좌절도 종종 맛보았다고 한다.
성도교회에서 만나 3년 동안 연애 후 결혼한 아내와 함께 50대를 보낼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왔는데, 그 응답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올초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은혜를 되새기는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내가 바로 너의 안정된 직장이다’라는 확신을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정 교수는 새로이 평안을 맛보게 되었고, 현재 주어진 가르치는 일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구 및 용역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며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기로 결심했다.

 

의미 있는 삶이 되기 위한 세 가지 꿈
그는 앞으로 세 가지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 꿈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자하는 꿈들이다. 자신이 옥한흠 목사로부터 받은 제자훈련과 친구 및 선후배들과의 교제는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됐고, 자기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의미 있는 꽃과 같은 삶으로 되돌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꿈은 60세 전에 전문인 선교사가 되어 러시아와 중국 등 동북아시아 선교 및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꿈이다. 오래 전부터 아내와 이 꿈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그는 그동안 배운 모든 학문과 신앙을 쏟아 붓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 꿈은 한 때 수학했던 캐나다 리젠트대학처럼 평신도 중심의 신학교를 세워 보고 싶은 꿈이 그것이다. 이 학교는 목회자를 기르고 재교육시키는 것 못지않게 신학 및 기독교 세계관과 영성을 겸비한 다양한 분야의 평신도를 훈련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정 교수는 이런 신학대학원이 우리나라에도 진작에 세워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기독교 세계관과 학문분야의 접목을 통해 기독교가 세상에 뒤쳐져지지 않는 학문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의 세 번째 꿈은 통일이 되면 아버님과 어머님을 아버님의 고향인 함경남도 단천에 이장해 드리고, 특히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교육기관 시설을 짓고 싶은 것이다. 64세에 소천하신 어머님께서는 노후를 후에 감사를 표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나머지 부분처럼 이제 정세열 교수는 다른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어 한다. 예수의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들에게 다가 가 의미 있는 영혼으로 쓰임 받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학 력
서울대 공과대학(산업공학) 및 동 대학원(경제학석사) 졸업

캐나다 리젼트대학(신학대학원)에서 수학

미국 예일대학교(경제학박사) 졸업.

 

경 력
육사 교수부 경제학과 교관

연변과기대후원회 동북아경협센터 기획담당 위원

한국개발연구원 초빙연구원,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서강대 경제학과 계약교수,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 자문위원
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기독교학문연구회 이사

Vol.93 200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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